쓸모없는 것들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 축제는 왜 예술과 친해야 할까?
축제가 없어도 우리는 산다.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음악을 듣지 않아도 당장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축제와 예술은 둘 다 생존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늘 그 생존 너머에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린 다음에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자아실현, 가치에 대한 갈망, 아름다움을 향한 마음. 축제와 예술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이것을 ‘무용(無用)함의 미학’이라 부른다. 쓸모없음에서 출발해 삶의 격을 높이는 것, 축제와 예술이 가장 깊이 닮은 지점이 여기다.
그런데 축제 현장의 예술은 어떤가. 예술이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왜 필요한지는 모른다. 그래서 빈 시간을 채우려고 공연 하나를 넣고, 빈 공간을 채우려고 전시 하나를 연다. 방문객을 조금 더 붙잡아 두려는 액세서리인 셈이다. 이런 기능적 결합으로는 축제의 본질이 살아나지 않는다.
길은 하나다. 축제 기획 초기부터 예술가가 참여해야 한다. 창작의 과정과 예술의 가치를 아는 기획자, 아티스트 그룹, 예술감독이 축제 준비의 한가운데 서야 한다. 그래야 축제가 프로모션 이벤트나 돈벌이 수단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는다. 예술은 부대행사가 아니라 축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어야 한다.
그럼 축제에 예술을 더한다는 건 무대 하나를 세우면 되는 일인가. 전시장을 만들면 되는 일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공연무대 하나보다 중요한 것은 축제장 전체를 예술적으로 디자인하는 환경 연출이다. 키 컬러와 축제 컨셉에 맞춰 조형미가 있는 공간을 만든다. 축제장 전역을 감싸는 음악. 행사장을 들어서는 순간 ‘여기는 일상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예산이 빠듯하다고 하자. 무대 하나를 세울 것이냐, 환경 연출과 전관 음향에 쓸 것이냐.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먼저 택한다. 공연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만 남지만, 공간의 공기는 축제장에 있는 모두에게 하루 종일 스며든다. 일탈이 허용되는 해방구의 감각은 무대가 아니라 공간이 만든다.
프랑스 리옹의 빛축제를 보라. 12월의 나흘 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캔버스가 된다. 광장과 성당, 골목과 공원까지 작품이 놓인다. 관객은 객석에 앉지 않고 도시를 걸어 다니며 작품 속을 통과한다. 200만 명이 넘게 찾는 이 축제의 무대는, 결국 도시 그 자체다.
체험 프로그램도 다시 봐야 한다. 공연 관람과 전시 관람은 축제장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가 굳이 축제장에서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내 안에 잠든 예술성을 발견하고 싶어서다. 창작의 과정에 잠깐이라도 손을 얹어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지금의 체험은 너무 얕다.
천 명에게 수박 겉핥기식 체험을 나눠주는 건 사실 가장 쉬운 기획이다. 구백 명의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백 명의 방문객이 예술가와 깊이 만나 창작의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 편이 낫다. 그 백 명은 축제가 끝난 뒤에도 그날을 오래 기억한다. 경험의 밀도가 확보될 때 축제의 예술적 가치가 증명된다.
덴마크 로스킬레 페스티벌의 ‘드림시티’가 그렇다. 참여자들이 축제 두 달 전인 4월부터 현장에 나와 제 손으로 캠프를 짓는다. 해적선도 나오고 설치작품도 나온다. 축제가 끝나면 함께 치우고 돌아간다. 관객이 아니라 창작자로 여름을 나는 것이다.
만일 예술축제를 기획한다면 하나 더 짚고 싶다. 예술축제의 수용자는 청중만이 아니다. 예술가 자신이기도 하다. 전공생과 중견, 원로 아티스트와 세계적인 프로가 한자리에서 서로의 세계를 만나야 한다. 공연 한 번 하고 출연료 받고 빠지는 축제는 예술축제가 아니라 공연이벤트나 마켓이다.
축제가 마켓과 다른 이유는 분명하다. 거래를 넘어선 만남이 있고, 교류가 있고, 자극이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린츠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해마다 80여 개국에서 1,400명이 넘는 예술가와 과학자를 불러 모은다. 작품만 걸어두지 않는다. 도시 곳곳의 열린 실험실에서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만들고 토론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해마다 동시대 예술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진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리더의 안목에서 출발한다. 예술적 안목과 큐레이션 능력은 예술감독만의 몫이 아니다. 총감독과 연출감독이 적어도 한 장르는 깊이 이해하고, 예술가와 비평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의 안목이 딱 그 축제의 수준이 된다. 안목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오래 보고, 오래 듣고, 오래 대화해야 자란다.
축제와 예술은 친하게 지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축제를 기획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창작 과정을 닮아가야 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그 무용한 것들의 힘을 믿는 축제만이, 사람의 삶을 바꿔놓고 지역을 바꾼다.